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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물굿의 수난사라고 말한다면, 여러분들도 상상하듯이 대표적인 예가 일제시대일 것이다. 물론, 봉건시대에서도 풍물굿의 수난이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풍물굿이 갖고 있는 공동체적요소 때문에(모여서 자신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지배계급의 입장에서 보기에 자신들의
존재기반을 위협하는 굿들을 항상 감시하고 지켜봤던 것이다.
1937년 원경하(元景夏)가 호남別遺御史로 임명되어서 전라도 부안에
들렀을 때, 두레의 농기(旗)와 풍물기(器)가 민중들의 반란시에 군용물(軍用物)이 될 수 있다고 보고 농기와 풍물기들을 몰수한 적이 있고,
1838년 '암행어사 남태량(南泰良)'이 두레에 대하여 임금께 보고를 하자, 임금이 "왜 농민들은 꽹과리와 징을 가지고 농사를 짓느냐?"고 묻자
우의정 송인평(宋寅明)은 "농사를 짓고 수확을 할 때는 모두가 그 악기를 가지고 일을 한다"고 대답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영조실록(英祖實錄)}에는 농악에 대한 국왕의 물음에 암행어사는 들에서 일을 할 때 일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꽹과리와 북을 두드리어 사기를 올려
일을 하게 한다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또 임금이 두레의 농기(農旗)가 군대에서 사용하는 깃발과 같은 것이냐고 묻자, 호남 암행어사는 농기와
풍물기는 군대용이 아닌 백년민속으로서 금지하기가 어렵다고 대답한 기록이 있다.

이와 같이 단편적이나마 호남지방에는 두레와 풍물이
성행하였음을 알 수가 있고, 또 조선왕조의 지배층이 두레와 풍물에 대하여 그렇게 호의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대시한 것이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농민이 반발해서 폭동을 일으킬 염려가 있기 때문에 양반들은 농민들을 조종하여 세뇌하려고도 하였다. 그리하여 풍물을
하게하여 쌓였던 불만을 발산시켜 반발을 사전에 방지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현상은 일제시대 때에는 식민지정책의 하나로 농민들이 단합하게 되는
풍물을 금지시켜 한국인의 공동체를 해산시킨 데 목적을 두고 벌어졌다.
1910∼1945년의 일제 강점기에는 화폐경제가 농촌사회에
가일층 침투하고, 일제의 식민지 정책의 영향으로 변화를 겪게되었다. 그 내용으로는 두레의 쇠퇴와 소멸, 공동체적 두레의 변질 등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다수의 두레와 풍물이 쇠퇴하고 소식민지 정책의 압력하에서도 강인하게 존속하였다. 그 예로서 충청도 홍성군의 경우 1915년
197개의 두레가 존재하고 있었고, 그 중 풍물을 하는 곳이 164개였고, 풍물을 하지 않는 두레는 33개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2차세계대전
전후부터는 한국의 장년들을 징용하고, 청년들을 징병했으며 곡물을 공출케 하였고 풍물기(징, 꽹과리, 나팔) 등을 헌품하게 하였으므로 풍물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박탈되어 버렸다. 또한 6.25동란의 여파로 계속 사회적 불안과 서구문화의 영향 그리고 농촌의 생활환경 변화로 두레가 없어져
버림으로 풍물굿이 삶과 점점 유리되었다.

풍물굿의 단절, 왜곡은 민중정통사의 단절에 따른
민중문화의 단절, 왜곡과 그 궤를 같이 한다. 19세기 말까지 민중문화로서의 건강성을 지녀왔고, 또 급격하게 사회경제가 변화하는 와중에서도
다양한 변화들을 능동적으로 수용해내던 풍물굿은 세 번의 커다란 단절사를 갖게 된다. 첫째가 일제식민통치 그 자체와 민족문화
말살정책이고, 둘째가 해방군이라는 면목하에 가치절상되어 마구잡이로 들어왔던 GI문화(퇴폐적인 미군사문화)로 시작되어 식민지문화로
고착되어가는 과정에서고, 셋째가 산업화 시대 이후의 본격적인 자본주의 개인주의화 시대의 가치혼란 시기이다.
일제시대와 미군정문화 유입기까지는그래도 풍물굿의 양적 쇠퇴와 부분적 훼손이라는 점증적인 쇠퇴과정이었는데, 풍물굿이
결정적으로 양적, 질적 몰락을 가져왔던 시기는 마지막 단절기간이었던 산업화 시대에 들어오면서부터이다. 특히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는 70년대
초반에는 전근대적인 미신이라는 명목 하에 단위마을의 정신적 지주였던 당산나무와 더불어 마을마다 그나마 간직해오던 굿물이 깨지는 수난을 겪었고,
나아가 아예 풍물굿판을 벌이지 못하게끔 행정적 압력을 받았다. (여기에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예전에 한 TV프로에 '북'을 만드시는 분이
나왔는데, 그 분에게 "가장 경기가 좋았던 때가 언제냐"고 묻는 사회자 물음에 "해방이 되고 나서였다"라고 하셨다. 각 마을마다 해방이 되서 그
기쁨을 풍물에 실어 한판 놀려고 하니까 제일중요한 북이 없더라는 것이다. 쇠는 마을마다 상쇠분들이 잘 숨겨(?)놓고 있어서인지 쇠는 있는데 북이
없으니까 마을에서 사람을 뽑아 북을 사러와서 가죽을 엮어서 채 마르지도 않은 북을 들고 갔다고 한다.)
그리하여 지배문화 주체자들의
의도적인 계획대로 민중들의 역동적인 힘이 내재되어 있는 풍물굿 정신은 거의 쇠퇴하여 버렸고, 지금 우리들의 눈에 보이는 것은, 첫째.
사물놀이화 - 신명이 거세된 서양 장르적 개념으로서의 음악화이다. 둘째. 매스게임화 - 외국 관광객을 위한 민속촌식 보여주기 농악화한
풍물굿 뿐이다. 그리고 70년대 이후 대학생으로부터 탈춤부흥운동이 다시 거세게 타오르기 시작하여 풍물굿에 대해 새롭게 눈을 돌려 발전방향을
모색하고 실천해내는 과정중에서도 풍물굿을 예술장르적으로 해석해내려는 시각에 의해 풍물굿 본디의 민중문화적 모습이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 시대의 전체적 삶과 연관되고, 민중의 총체적 삶의 흐름을 꾸려나가는 관점으로 풍물굿을 발전시켜나가는 것이 아니라, 예술만의 시각,
지배문화적 분류와 틀의 관점이 농후한 비민중적이고 서구 엘리트적인 시각으로 풍물굿을 재편집하려 하는 것들이 오히려 풍물굿이 건강하게 발전하고
민중의 삶이 발전하는데 상당히 부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굿과 공동체에 대한 관심은 결코 잃어버린 세계에 대한 몽상적 관심이
아니라 대중들 스스로의 문화를 자주적으로 생산케 하는 과학적 인식의 근거를 마련하느데 그 목적이 있다.
굿과 공동체는 분리되어
있는 별개의 요소가 아니라 전체적으로 통일되어 있는 하나이며, 굿은 그 자체가 공동체성을 드러내고 공동체는 그 자체가 굿성을 드러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굿과 관련하여 공동체에 대한 맹목적인 우호적 태도나 선입견적 접근은 객관적 태도가 아니며 더 사려깊은 역사인식의 무기로서
공동체를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풍물굿의 생명력은 공동체적 신명의 흐름을 통한 주체적 삶의
훈련이라는 데 있다. 그 집단신명은 괜히 신이 나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같은 계급적 울타리 속에서, 그리고 나름의 삶의 규율 속에서 일상들을
주고 받으며 어려운 삶의 조건 내에서도 희로애락의 삶들을 공유해내는 오랜 인간적 관계 속에서 서로 동의 해내는 삶의 과정이 들어가 있는
집단신명이며, 무엇보다도 모든 사람을 주체적 인간으로 훈련시켜내는 신명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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